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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이중국적 (송태근 목사 79회) 05.07.2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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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국 적
송태근 목사 (79회 강남교회)

국적의 기준에는 두가지가 있다. 속인주의와(屬人主義)와 속지주의(屬地主義)가 있다. 속인주의는 부모의 혈통을 기준으로 국적을 인정하는 경우이고 속지주의는 태어난 지역을 중심으로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이다.
이렇듯 나라마다 적용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중국적자가 생긴다. 한국 사람의 경우 이중국적자가 되는 경우는 두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째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후천적 이중국적자가 있고 둘째는 한국 국적의 부모사이에서 미국이나 외국에 살다가 한국 국적과 외국 국적을 동시에 취득하는 선천적 이중국적자가 있다.

지금 사회적으로 저명인사들의 자녀나 연예인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불거져 나오는 ‘이중국적’ 문제는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도 간단치 않는 문제다.
이중국적 허용을 반대하는 입장에서의 견해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중국적이라는 신분을 악용해서 자기 이익에 따라 사용하므로서 상대적으로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국민의 반감에서 나오는 정서이다.
그 문제의 핵심에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기본적인 의무인 병역의 의무와 납세에 대한 의무를 기피하는 수단으로서 사용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반면에 찬성하는 쪽에서의 입장도 만만치 않다. 그 이유로는 세계화라는 명분하에 경제적인 실익과 인재의 융통성 있는 국가적 활용이라는 명분을 주장한다. 두 견해가 다 일장일단이 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접근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적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발언에서도 보듯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말씀처럼 국가가 요구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의무’를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하여 지켜야 하며 그 의무는 공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평해야 할 의무가 이중국적이라는 미묘한 상황의 선택 앞에 설 때 우리는 혼란스러워진다.
  
  과연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모두에게 이중국적이라는 똑 같은 상황을 놓고 선택 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면 그래도 군에 자진 입대 할 자가 몇이나 될까?  흔히 하는 말로 “군대 가고 싶어서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자조적 말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똑 같은 상황이 오면 우리도 장담 못한다.

문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일부 사람들이 자기의 의사를 따라서 국적을 선택하고 자기가 선호하는 문화를 선택 한다고 해서 죽일 놈으로만 매도할 것인가? 참으로 조심스런 얘기지만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애국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가치이듯이  보다 더 높은 가치를 생각해야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으로서 한 개인의 인권이다. 국제 사회에서도 인권 개념은 달라지고 있다. 국적을 이탈 할 권리가 한 개인의 인권의 일종으로서 보호되고 있는 추세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국경의 의미가 더욱 희미해 질것이고 나라간의 빈번한 왕래로 국제결혼도 많아지고 있다. 더우기 유학이나 해외지사 해외 공관의 체류로 인하여 부모에 의해 선택의 여지없이 해외에서 태어난 선천성 이중국적자가 증가를 하고 기러기 아빠들이 사회의 이슈가 될 정도로 사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마당에 획일적인 잣대로 이중 국적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 하는 처사이다. 문제는 선택의 기회를 악용해서 국민의 공분을 사는 극히 일부 약삭빠른 사람들이 문제이다.

  셋째로 군대가면 손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한 거시적이고도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군은 현대화에 맞추어 가장 전문화 된 집단을 만들어야한다. 또한 고질적인 야만의 문화를 털어 내고 한 인격으로서 존중되는 건강한 문화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아직도 사병들을 구타하고 인분을 먹일 수 있는 군대라면 어느 부모가 자기의 자식을 군에 보내려 하겠는가? 과거 보다는 나아 졌다고는 하나 우리의 군은 선진국의 군에 비해서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군인이 되면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 공동체를 계속적으로 지향해야 한다.

  넷째로 성경의 역사는 끊임없는 이민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중적 나그네의 삶이 성경의 역사이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모두가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신약에서는 바울이 그러한 삶을 살았고 복음이 확장된 기독교의 역사 한 복판에는 온 세상을 향하여 흩어져 가는 사람들의 기록들이다. 이러한 흩어져 살아간  고단한 나그네의 삶들이 선교의 장을 열지 않았는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일부 이기적인 지도층 몇 사람들의 행태에 너무 시각을 빼앗기지 말고  국익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이중국적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사실 우리 신분 자체가 이중 국적자이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이중국적의 문제를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데 반드시 훌륭한 무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도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의 권리를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와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불변의 진리이다. 이중국적 그 자체를 악과 선으로 규정짓는 이분법을 떠나서 적어도 사회에서나 교계에서 지도자가 되어 섬기기 위해 가져야 할 자유의 원리이다. 우리사회가 이중국적의 문제에 대해서 아직도 경직된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복음을 위해서 성숙된 분위기가 이루어질 때까지 스스로 자기의 권리와 이익을 유보하는 단호한 용단과 모범이 요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서 솔선수범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낮추고 버리는데 앞장서는 존재이다.

만약 스스로의 이익과 권리를 내려놓을 줄 아는 자기희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교회를 따를지 않을뿐더러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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